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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by 크랭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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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소설계의 대문호로 알려져 있다. 현실주의 소설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이 있다. 사실 나는 이 작품들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에게 입문하기 위해 중단편 소설로 이 책을 택했다. 19세기 영국 시인인 매튜 애널드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두고, '그의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삶의 조각과 같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많은 비평가에 따르면 톨스토이의 묘사는 굉장히 자세하고, 훌륭하고 지극히 상세하다고 한다. 나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그러한 부분을 몸소 체험했다. 주인공이 겪는 감정과 그의 정신상태가 너무나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이는 그의 작품세계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진다. 그렇다면, 어차피 그렇게 되어버릴 것이라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체 잘 산다는 것은?



죽음의 문턱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구걸로 살아가는 거지든, 막대한 권력을 쥔 정치인이든,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든, 죽지 못해 살아가던 사람이든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따뜻한 숨결이 몸을 떠나고 몸에 맴돌던 마지막 온기가 스러지고 나면, 종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던 존재는 무생물로 돌아가고 만다. 어떻게 생각하면 슬프고 마음 아픈 과정이지만, 다르게 접근하면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어떤 물리학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몹시 슬프고 부정적인 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생물학적 과학적 관점에서는 죽음의 상태가 훨씬 흔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을 둘러보면, 살아있는 것은 얼마 없다.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 죽은 동물로 만든 음식, 죽어있는 상태의 수많은 주변물들. 삶의 상태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당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서서히 다가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책 제목에서부터 눈치챌 수 있듯이 이반 일리치다. 그는 성공한 판사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던 사람이다. 책의 도입부는 그의 죽음과 장례식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친한 친구들조차 그의 죽음에 진정으로 관심 갖지 않는다. 카드 게임에 정신이 팔린 장례식 조문객들과 남편 죽음으로 받을 수 있는 보험금에 더 관심 있어 보이는 이반 일리치의 아내를 보고 있자면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그는 잘못 살아온 걸까? 



도입부 이후의 책은 이반 일리치의 삶과 그가 병을 얻게 된 과정, 병을 얻게 되고 나서 서서히 죽음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한 심리적 묘사와 함께 다루고 있다. 특히나 죽음을 앞둔 사람 특유의 절망스러운 심정과 바깥 세계의 행복에 이질감을 느끼는 음울한 관조자적 태도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죽음을 그저 조금 '덜 품위 있는' 혹은 '유쾌하지는 않은' 일로 치부하고 더 나아가 위선을 떨며 자기 죽음을 기다리는 다수의 사람에게 분노와 환멸을 느낀다. 그들에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자신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비극과 같다. 그들은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를 보며, 마치 한 편의 비극적인 연극을 보듯이 표면적으로는 가식적 위로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곧 죽을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그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거짓과 속마음이 이반 일리치는 견딜 수 없게 혐오스럽다. 모든 이를 향한 원망과 미움이 커진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 역시 누구보다도 가식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그의 전담 의사는 극도로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하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그러한 태도는 이반 일리치가 판사로 재직할 때 항상 유지하던 태도와 일치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과 공감의 부재에 누구보다도 분노하지만, 사실 그의 삶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고, 그럴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가 타인을 향한 진심 어린 공감을 제공할 의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극중 그의 하인이 이반 일리치를 향해 보이는 상냥함과 이해심, 공감은 그에게 더욱 값지게 다가온다. 그러한 온기는 온갖 위선 속에서 발견한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이 소설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 역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인간이 진심 어린 공감과 자신을 향한 관심에 더욱 목마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하다. 그는 죽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엄습하는 공포를 손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일까?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일까? 즐겁고도 품격있게 살아온 그는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의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반 일리치가 그를 짓누르는 막중한 죽음의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는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소설, 그래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하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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